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15]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7:1-5)
예수님께서는 남을 비판(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남에게 정죄의 잣대를 들이대면 그 잣대로 우리 또한 정죄 받는다고 하신다. 흔히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한다. 남에게 들이대는 엄중한 잣대를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도록 우리 먼저 관대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 예로 예수님은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는 문제 삼으면서 정작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고 하신다. 왜일까? 이것은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남에게 비판적인 언사를 쏟아부을 수 없다. 자신의 부족함이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을 다그치게 된다.
(롬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멈추어야 한다. 설령 다른 사람의 죄나 실수가 명백해도 비판을 유보해야 한다. 우리도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는 마지막 순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되돌리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베드로는 그 치명적인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찾았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 승천하시고 30여년 가까이 되어 자신이 순교할 처지가 되었다. 베드로는 과거의 그 부끄러움을 씻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원했다. 이렇게 그는 자원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예수님께 참회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비판이 아닌 대안을 찾아야 한다. 비판을 대신할 영적인 카테고리를 찾아야 한다. 아마도 그것은 칭찬의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칭찬은 계속해서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지만 비판은 새로운 동기의 싹을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악기를 배우는 학생에게 가능성이 보인다며 좀 더 노력하라고 말해 주는 것과 너는 안되겠다고 포기를 권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나게 한다. 칭찬의 말을 들은 학생은 명 연주자로 서게 될 가능성이 있지만 포기를 권유받은 학생은 자신감을 잃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흠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부끄러워 하며 자신의 행위를 수정하려고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들보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겸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내 부족함이 드러나 보이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하길 원한다면 내가 먼저 온전해져야 한다. 설령 간섭하게 되었더라도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는 것에서 멈춰야 한다. 우리의 행위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