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한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Live with one sentence a day) }
(25) 하늘에게 행복을 달라 했더니 감사를 배우라 했다
1981년, 흑인 가운데 최장수자인 찰리 스미스(Charlie Smith, 1842-1981)가 138세로 플로리다주 바토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인생 138년은 고통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고통과 학대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미국의 남부와 서부를 헤매며 매를 맞고 모욕을 당하며 굶주렸다. 스무 번 이상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런데 그렇게 138년간 모진 삶을 살았던 스미스는 임종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스티븐스 목사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흑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노동도 감사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138년 동안 언제나 제 옆에 계셨음에 감사합니다"
찰리 스미스의 고백은 마치 구약성경의 야곱을 연상케 한다.
(창세기 47:8-9) '바로(애굽왕)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부산에 있는 [영혼이 춤추는 도서관] 강충걸 대표가 쓴 <Thank 365 이것 또한 감사하리라>(2024)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본문 첫 페이지에 "하늘에게 행복을 달라 했더니 감사를 배우라 했다" 는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이는 그의 삶의 좌우명이자 경험담이라고 한다. 이 문장은 베스트셀러 작가 이종선님의 <넘어진 자리마다 꽃이 피더라>(2016)는 책(P26)에서 인용했다.
이종선 작가는 말한다.
"떨어진 꽃을 주워가는 거 봤어요? 아무도 안 주워가요. 그런데 떨어진 낙엽은 사람들이 주워가요. 그 색이 고와 책갈피에 오래 간직하기도 하지요. 꽃은 안 주워가고, 낙엽은 주워가요"
내동댕이쳐진 삶이라 해도 결코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작가의 인생 해석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낙엽이라 해도 끝이 아니다. 비록 나뭇가지에게서 버림받았지만 결국 사람의 따뜻한 온기에 품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이와 같으리라. 말라 비틀어진 인생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삶을 살아갈 새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영국의 침례교 설교가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 목사는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지지 않는 은혜의 빛을 주신다." 고 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는 "몸에 한가닥 실오라기라도 감았거든 항상 베짜는 여인의 수고를 생각하고, 하루 세 끼니의 밥을 먹거든 항상 농부의 노고를 생각하라" 고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기한은 정하지 않으셨지만 장소는 모리아산으로 지정해 주셨다. 이삭이 누구인가? 아브라함과 사라가 백 세와 구십 세에 겨우 얻은 아들이다. 그런데 이삭이 십대 중반 쯤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이건 분명히 상식적인 요구가 아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은 결코 해선 안되는 요구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걸 요구하셨다. 만약 믿음이 어중간(於中間, midway)한 사람이었다면 '사탄아 물러가라' 며 핏대를 세우고 하나님께 맞섰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아브라함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만다. 이삭을 모리아산까지 사흘 길을 데려가 정말 죽이려 든다. 이상한 아버지다. 하나님께 내 아들만은 결코 안된다고 저항(?)했어야 했다. 그래야 좋은 아빠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보통의 상식으로 이 사건은 하나님이 좀 도가 지나쳤거나, 혹은 아브라함이 제 정신이 아니었던 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 그렇게 이삭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고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급히 아브라함을 불러서 중단시키신다. 또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숫양을 보게 하신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잡아 이삭을 대신해 제사를 드린다. '여호와이레'의 첫 실례(實例, real cases)다.
(창세기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9-13)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숫양을 잡아 제사를 드린 아브라함의 예배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이 일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 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쯤되야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에게는 이 요구를 하지 않으셨다. 만약 노아에게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추측컨대 이 미션은 아브라함만 성공 가능한 도전이었다고 본다.
모리아산에 울려 퍼졌을 아브라함의 새 찬송가를 상상해보라. 아브라함은 감사를 잘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순종을 잘해서 믿음의 조상, 곧 복의 근원이 된 것이라 믿는다. 그럼 감사를 잘하려면 어떻게 할까? 내 소견엔 순종이 앞서가면 감사할 일은 뒤따라 온다고 본다. 순종이 감사거리(Thank you material)를 생산해 낸다고 본다. 그런고로 감사의 습관을 키우는 훈련보다 순종하는 훈련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순종은 감사할 일과 복을 불러온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