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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문학n천국 2024. 10. 8. 08:02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한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Live with one sentence a day) }

(43)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근래 만들어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 스레드(Threads) >에 어떤 사용자가 올린 글이 있다. 그는 현대자동차 입사 최종면접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고 인사채용 책임자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입사를 꿈꾸던 지원자로서 지원했던 기간 동안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현대자동차의 미래와 무궁한 발전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1분 만에 인사담당자에게서 답장이 왔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그는 "이래서 대기업, 대기업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사채용 책임자의 답장 내용이다. "기술직 공고의 채용결과를 홈페이지에서 다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지원자의 세 줄의 글과 현대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최종 결과를 바꾸어 합격 통보가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혼자 씩씩거리든지, '두고 보자' 식의 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현대자동차의 발전을 기원해주고 축복했다. 그리고 불합격에서 합격으로 결과가 바뀌었다. 인생살이가 어찌보면 참 싱겁기 그지없다. 세 줄의 글로 당락(當落)이 뒤집혔기 때문이다.

일본 속담에 "남을 저주하려면 무덤을 두 개 파라" 는 말이 있다. 남을 저주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그 저주가 임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Revenge comes after revenge)는 말이 있다. 곧,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이다. 자기가 던진 것은 결국 자기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또한 '산울림 효과'(echo effect)라는 것도 있다. 산에 올라가서 ‘야호~’ 하고 소리를 지르면 맞은편 산에서 ‘야호~’ 하고 되돌아 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기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축복의 말, 평강의 말을 베풀고 살아가면 자신에게 그 축복과 평강이 임하게 되고, 저주와 불평을 토하면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의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가 하인과 함께 여행을 했다. 어느 날 흙이 묻은 구두를 닦지 않은 하인을 스위프트가 크게 책망했다. 하인은 변명을 늘어 놓았다. 구두를 닦아 봤자 주인님께서 나들이를 하시게 되면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 스위프트는 호텔 지배인을 불러 저녁 식사는 한 사람 몫만 가져 오라고 일렀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하인은 놀란 얼굴로 주인님을 모시고 다니려면 자기도 식사를 해야 한다며 배고픈 시늉을 했다. 스위프트는 하인에게 "이 사람아, 저녁은 먹어서 무엇하나? 나들이를 하고 나면 어차피 또 다시 배가 고파질텐데…" 하고 말했다. 그러자 하인은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갈라디아서 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그런고로 좋은 씨를, 좋은 성품을 뿌려야 한다. 긍정의 사고를 해야 한다. 감사해야 한다. 내 말의 씨앗을, 내 글의 씨앗을 내가 거두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에 지원했던 그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음에도 축복의 말을 뿌리고 다시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의 내 가난이 한순간에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병든 몸이 하루 아침에 낫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말과 글은 지금부터 스스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나날이 좋아질 것이다.

구약성경 창세기 31장에 보면 야곱이 20년 만에 처갓집 생활을 마치고 장인 라반의 집을 떠난다. 말이 좋아 처갓집 생활이지 머슴처럼 살았던 20년 세월이었다. 야곱은 고향 땅을 향해 길을 나선다. 물론 백주대낮(broad daylight)에 당당하게 대오(隊伍)를 갖추고 출발한 길이 아니다. 한마디로 야반도주(夜半逃走)이다. 장인이 그를 순순히 곱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아서다. 야곱은 때마침 장인과 처남들이 양털을 깎으러 타지(他地)에 간 틈을 타서 도망한다.

그 와중에 그의 아내 라헬은 자기 친정아버지 라반의 수호신(守護神), 곧 작은 우상을 몰래 훔쳐서 가져간다. 며칠 후 야곱이 도망친 것과 수호신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라반 일행은 야곱과 그 일행을 추격해 와서 따져 묻는다. “내 신들은 왜 훔쳤느냐?” 그러자 야곱은 “장인 어른께서 저희 가운데 누구에게서든 장인어른의 수호신을 발견하신다면,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야곱은 부인 라헬이 장인의 수호신을 훔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국 야곱은 자기 입술로 수호신을 훔친 사람을 저주했다. 그것이 자기 아내인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때마침 임신 중이었던 부인 라헬에게 산고(産苦)가 찾아왔는데 라헬은 고통 가운데 아이를 겨우 낳고서 그만 죽고 만다. 야곱이 선언한 저주대로 된 것이다. 과연 야곱이 그가 선포한 말 때문에 아내를 잃었다고 한다면 억지일까?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 신중해야 함은 분명하다.

(창세기 31:19-20)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창세기 35:16-19)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예수님께서 로마총독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예수님 양쪽에 두 명의 강도도 함께 처형되었다.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강도가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예수님께 은혜를 구했다. 비록 살인강도로서 죽어 가지만 예수님께 천국부활을 간구한다. 예수님은 그 강도의 간절한 요청을 허락하신다. 결국 그 강도는 죽어서 낙원, 곧 천국에 들어갔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누가복음 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생명의 말을 하자. 축복의 말을 하자. 모든 악한 것은 입에도, 마음에도 담지 말자. 그러면 우리 모두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다. 생명을 심어 생명을 거두자. 복을 심어 복을 거두자. 감사를 심어 행복을 거두는 삶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