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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소수가 되라

문학n천국 2024. 10. 22. 08:59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한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Live with one sentence a day) }

(46) 창조적 소수(小數, minority)가 되라

풀을 찾아 1,600㎞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동물이 있다. 누우(Gnu)이다. 한반도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의 거리가 1,100km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먼 거리이다. 누우(Gnu)는 아프리카의 초식동물로 수만 마리가 떼를 이루어 살아간다.

누우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건기(乾期)가 찾아오면 또 다른 풀밭을 찾아 대장정(大長程)에 나선다. 이 대장정의 절정은 바로 그들 앞에 놓여있는 강을 건너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넘어야 할 강에는 천적(天敵)인 악어들이 그들을 삼키려고 도사리고 있다.

바로 그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첫 번째 누우가 강물에 뛰어든다. 두 번째, 세 번째 누우도 강물에 뛰어든다. 그리고 또 다른 누우들이 강물에 뛰어든다. 그들은 악어들의 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살점은 찢기고 강은 곧 핏빛이 된다. 그렇게 소수의 누우들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보여준다. 악어가 허기진 배를 다 채우고 마침내 입을 다물 때까지 소수의 이런 자발적인 희생은 계속된다. 그리고 악어가 배를 채우는 동안 나머지 누우들은 떼를 지어 무사히 강을 건넌다.

복효근(卜孝根, 1962∼) 시인의 <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2002) > 이라는 시(詩)가 있다.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우들이 강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 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이렇게 소수의 누우들은 종족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악어의 밥이 된다. 아무나 생각해 낼 수 없는 헌신이자, 모두를 살린 소수의 창조적인 헌신이다.

2014년에 개봉된 영화 <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의 명대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Sometimes it is the people no one imagines anything of who do the things that no one can imagine)

그렇다.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일을 생각해내고 실행하는 사람이 창조적 소수이다. 이들에 의해 역사는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배 한 척을 가지고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가족들을 배에 태우고 호수에 나가 낚시를 즐겼다. 여름이 지나자 그는 배를 보관해 두기 위해 뭍으로 배를 끌어 올렸다. 그 때 배 밑에 언뜻 봐서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너무 작은 구멍이었기에 그대로 보관해 두었다가 돌아오는 봄에 배를 수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배에 페인트칠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해가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두 아들은 배를 타고 호수에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배를 타겠다고 말을 했고, 아버지는 배에 구멍이 뚫린 사실을 까맣게 잊고 배를 타도록 허락했다.

아이들이 배를 타고 나간 뒤 두 세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유는 배 밑에 구멍이 뚫린 것을 수리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고, 더군다나 자기의 아들들이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호숫가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 때 마침 두 아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생각에 구멍이 뚫린 배 밑창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누군가가 구멍 뚫린 배 밑창을 튼튼하게 막아 놓은 것이 보였다.

그때 아버지의 머리 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선물을 사들고 페인트공을 찾아갔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정말 무엇으로 감사함을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부탁한 것은 배에 페인트칠을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배 밑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시고 구멍까지 막아 주셨으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제 두 아들이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페인트공은 “저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만한 일이었다. 그걸 하지 않았다고 해서 책망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이왕 일을 하게 된 것이므로 자발적으로 일을 했다. 그리고 그것때문에 한 가정의 행복이 지켜졌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는 말했다. “창조적 소수가 세상을 이끌어갈 때 그 역사는 흥하게 되고 지배적 소수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 멸망이 온다.” 

구약성경 사사기 7장에 보면 미디안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미디안과 싸우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군사를 모집했는데 32,000명이 지원했다.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군사가 너무 많다며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그래서 준비 안 된 사람, 그리고 마음속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22,000명을 돌려보냈다. 이제 10,000명이 남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직도 많다.”고 하셨다(삿7:4). 그래서 또 돌려보냈다. 그래서 결국 300명이 남았다. 이들을 기드온의 300 용사라고 부른다.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정말 소수의 병사들로 전쟁에 임하는 것이다.

(사사기 7: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그러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300 용사를 통해 135,000명의 미디안 연합군을 격퇴하게 하셨다(삿8:10). 무려 450배 규모의 군대를 거의 전멸시키게 하셨다.

숫자가 적은 것은 분명 열세이지만, 그것이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별히 하나님이 붙드시는 소수를 이길 것은 없다. 어느 군대도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없다. 기드온의 300 용사는 신앙으로 무장한 군사들이다. 이들이 창조적 소수이고, 승리를 쟁취한 사람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