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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된 위험을 무릅써라

문학n천국 2024. 11. 3. 17:02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한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Live with one sentence a day) }

(48) 계산된 위험을 무릅써라
(부제 : 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면 된다)

정호승(鄭浩承, 1950~) 시인의 산문집 <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 준 한마디 >(2013)에 "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면 됩니다" 라는 글귀가 있다. 책 내용의 일부이다.

[ 사람들이 산 속에 은거하는 한 수도자를 찾아가 물었다. "믿음이란 무엇인지요? 당신의 믿음을 보여주세요." 수도자가 한참 동안 먼 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 칠 일 뒤에 저기 보이는 산으로 오십시오. 그러면 내가 산을 움직여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습니다."

칠 일 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도자가 산을 움직이길 기다렸다. 산 앞에서 고요히 기도를 마친 수도자가 이윽고 산을 향해 소리쳤다. "산아, 움직여라!" 하지만 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수도자가 외쳤다. "산아, 움직여라!" 산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수도자가 다시 산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산아, 내게로 오라!" 산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수도자가 한참 동안 산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산아,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가면 되지!" 하고 웅성대는 사람들을 지나 산을 향해 갔다 ] 는 내용이다.

수도자는 믿음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믿음을 향해 떠나라" 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다시말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찾아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 보다 그것을 찾아 떠나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 위험부담(危險負擔)은 당연히 뒤따라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부담 때문에 많은 이들은 제자리에 머물기를 선택할 것이다.

미국의 여류시인 자넷 랜드(Janet Rand)의 < 위험들 > 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 웃는 것은,
바보처럼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우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일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는 것은 죽는 위험을,
희망을 갖는 것은 절망하는 위험을,
시도하는 것은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세상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아침에 아이들 학교에 보내놓고 아무 걱정 안 하는게 쉬운 일인가? 아침에 출근하는 가족을 세상에 내보내고 안심할 수 있을까? 아니다. 뉴스를 보면 저녁에 귀가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장례식장으로 가족을 부르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 저녁에 귀가하기까지 간헐적으로(intermittently) 기도를 계속할 수 밖에 없다. 온갖 위험이 세상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Siamese twins) 분리수술에 성공한 미국 존스 홉킨스병원(Johns Hopkins Hospital) 신경외과 의사이자, 책 < 위험을 감수하라(Take the risk)> 의 저자 벤 카슨(Ben Carson,1951~)은 언젠가 한 기자가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 자매의 분리수술 같은 위험한 일들을 수없이 해냈는데, 의사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뭐 하러 위험을 감수하느냐고요? 아닙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조지 패튼(Georg S. Patton, 1885-1945)은 “계산된 위험을 무릅써라. 이는 무모하게 덤비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Take calculated risks. That is quite different from being rash) 라는 말을 남겼다.

구약성경에 아브라함의 얘기가 있다.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한다. 성경에 아브라함의 얘기는 그의 나이 75세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고향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새로운 땅으로, 먼 곳으로 이주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인데 말이다.

(창세기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사실 요즘처럼 비행기나 선박이나 철도가 있거나,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거나. 이삿짐센터가 있다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이다. 이동수단도 변변치 않았고, 무엇보다 치안(治安)이 불안했던 시대였다. 강도나 도적의 위험이 가는 곳마다 도사리고 있었다. 다시말해 먼 땅으로의 이주는 결코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위험 그 자체였다.

아브라함 가족은 하란 곧, 지금의 서아시아 튀르키예(터키)에서 출발하여 북아프리카인 이집트(애굽) 땅까지 도보로 이동한다.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그 거리는 대략 800~1,000km이다. 이삿짐 한 번 푸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계산된 위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그리고  '복의 근원' 이 되게 했다. 여기서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복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이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인해 만민이 복을 받는 이 공식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속해서 본받는다면 말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세상의 예측 가능한 모든 위험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런 믿음이다. 세상의 그 어떤 위험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예레미야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이사야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