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한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Live with one sentence a day) }
(55) 칠흑같은 어둠에서도 희망을 보라
정호승(鄭浩承, 1950~) 시인의 < 산산조각 >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또한 정호승 시인의 < 봄 길 > 이라는 제목의 시도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떨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시인은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노래하고, 우리가 그 희망의 주체가 되기를 권면하고 있다고 본다. 희망을 싹 틔우는 주인공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걸어야 한다. 멈춤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내 모습 그대로 걸으면 된다. 걷다 보면 멈춤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산산조각 난 모습이라도 그 모습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오늘 나의 행보가 누군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하며 말이다.
묘향산(북한, 妙香山,해발1,909m)에 오래 살았다는 까닭에 서산대사(西山大師)라는 호(號)를 갖게 된 서산대사 휴정(休淨, 1520~1604)의 <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 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도 애송했다고 한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걸어간 이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훗날 뒷사람의 길이 된다)
악성(樂聖), 곧 '음악의 성인'으로 불리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많은 질병에 시달렸다. 간경화, 신장질환, 폐질환등이 있었고 가장 절망적인 질병은 귓병이었다. 귓병이 심해지자 생을 거의 포기하는 상태가 되었고, 1802년 32세의 나이에 유서를 썼다. 그러나 유서는 25년 후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다. 그것은 동생들에게 남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이다. 하일리겐슈타트(오늘날의 빈)는 도시 이름이다. 음악가가 청력(聽力)을 잃는다는 것은 화가가 시력(視力)을 잃는 것과 같은 치명적인 일이다.
"....내 옆의 모든 사람은 플룻 소리를 듣는데 나에게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누군가는 양치기의 노래 소리를 듣는데 나는 전혀 듣지 못할 때 느끼는 그 큰 굴욕감이란…. 이런 꼴을 자주 당하다 보니 나는 거의 희망을 잃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우리가 잘 아는 베토벤의 명곡들은 그가 청력을 잃어가던 1796년 이후, 그리고 유서를 쓴 1802년 이후 탄생된 곡들이 많다. 교향곡 제 5번 < 운명 >은 1809년에 작곡했고, 교향곡 제 9번 < 합창 >은 1824년에 작곡했다. 다시말해 상황은 상황일 뿐, 환경은 환경일 뿐 우리가 거기에 잠식(蠶食)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명령하셨다. 니느웨 성에 가서 니느웨 성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하셨다. 어찌보면 단순한 사역이다. 그냥 그대로 순종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는 이 명령을 즐거워 하지 않는다. 원수의 나라에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요나는 하나님의 진심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경고를 함으로써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말이다.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이 싫었을 수도 있다.
결국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신 반대 방향으로 도망하고 만다. 다시스 항구를 피신의 목적지로 삼고 배를 탄다. 성서학자들은 다시스가 오늘날 스페인의 항구 도시라고 주장한다. 마침 도피 자금도 부족하지 않은 듯하다.
(요나서 1:1-3)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이렇게 거꾸로 가는 요나를 하나님께서 태풍을 일으켜 큰 물고기 뱃 속에 가두어 버리신다. 이 큰 물고기에 대해 한국창조과학회는 백상아리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백상아리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위를 가지고 있고, 상어는 먹이를 소화하지 않고 오래 저장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 달 동안 먹이를 소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뱃속에 저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상어는 때때로 위 속의 먹이를 토해내기도 한다는 이유에서다.
(요나서 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요나서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물고기 배에 갇힌 요나는 하나님께 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자 온 성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악에서 떠난다. 그리고 결국 요나의 예상대로 니느웨성은 멸망하지 않는다.
(요나서 3:4-5)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상어 뱃 속에 갇힌 요나에게 내일은 없었다. 또한 어린 아이들만 12만명이었던 대도시 니느웨도 심판의 불로 멸망할 뻔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멸망에서 벗어나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요나에게 임한 칠흑같은 어둠은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니느웨도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우리도 예수 안에서 희망을 보아야 한다. 고난은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 신앙, 예수 신앙의 결국은 풍성한 생명과 행복이다.
(요나서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