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성경인물 에세이 {평범하거나, 위대하거나 }
[1] 아담
인류 최초의 인간,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이 첫 사람 아담의 정체성이다(창1:27, 2:7). 아담은 에덴동산을 터전으로 살았다. 이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창2:8).
에덴동산은 낙원(樂園)이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단 한가지 부족한 게 있다면 여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담의 근육과 땀 흘리는 모습을 칭찬해 줄 여자가 없었다.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가꿀 때 시원한 냉수 한 사발 배달해 줄 여자가 없다는 게 옥에 티(a fly in the ointment)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을 보시고 이건 좋지 않다고 판단하셨다(창2:8). 그렇다고 남자 하나 더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돕는 배필, 곧 육신적인 외로움을 채워줄 여자의 필요성을 생각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하와라는 이름을 가진 아담의 아내가 창조되었다. 하와는 아담과는 달리 흙으로 창조되지 않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졌다(창2:22).
흙과 갈빗대, 무슨 차이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흙은 온 땅의 모든 생물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이기에 남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갈빗대는 남자의 심장을 비롯한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기에 여자는 그만큼 남자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함께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보고 엄청난 동질감(同質感)을 느꼈다. 마치 헤어졌던 전우(戰友)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예쁘다' 혹은 '아름답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하와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은 '아름답다'는 말이었을 텐데 말이다.
(창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과 하와가 사랑을 키워가고 있을 때 그들의 인생에 뱀이 등장한다. 뱀은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간교했다(창3:1). 왜 간교한 동물을 창조하셨을까? 뱀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반하는 존재인데 말이다. 추측하건대 인생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도전이야말로 사람을 보석처럼 연마하기 때문이 아닐까? 많은 도전을 극복해 낸 자만이 옥석( 玉石)이 되기 때문이리라. 뱀은 곧 우리네 인생에 유혹이고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뱀은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는지 물었다. 순진한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 금지되어 있고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대답해 준다. 그러자 뱀은 드디어 자기가 하고자 했던 말을 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의 이 말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구심을 갖게 했다.
(창3:3-4)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결국 하와는 뱀의 꾀임에 빠져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 아담에게도 그것을 먹였다. 아담이 왜 강력 반발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하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담도 동의했던 것일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가장 먼저 깨닫게 된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자기들이 나체로 생활하고 있다는 자각(自覺)이었다.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지금까지 활보하고 다녔다는게 부끄러워졌다. 동물들은 평생 나체로 살아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범죄한 인간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얻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뱀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아담 부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 부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시면서 먼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덮어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부부에게 아들들이 태어났다. 그들의 이름은 가인과 아벨이었다. 훗날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아들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아마 아담의 가정교육이 조금은 신앙적이었던 것 같다.
가인은 땅의 첫 소산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제물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시면서 뜻하지 않게 형제간의 살륙으로 일이 번졌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것이다.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아담과 하와가 겪었을 상실감은 매우 컸을 것이다. 자식 하나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그 땅에서 추방되었다. 그 이후 가인은 정착하지 못하고 유리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창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렇게 가인은 인류의 첫 범죄자로 기록되며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유리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첫 단추가 되었던 아담도 930세가 되어 죽었다.
신약성경이 아담에 대해 내린 최종적인 평가는 이렇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은 세상에 죄를 들여온 사람, 곧 죄를 수입해 들여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담이 수입한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고 찬양하기 위함이다.
아담, 가장 많은 기회가 주어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기회를 잃고 고뇌 속에 살다 간 사람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분명 기회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기회를 가지고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아담 부부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